메모를 하는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을 자신에게 선물하는 셈이고 결과적으로 메모는 '자신감' 혹은 '자기존중'과도 관련이 있다. 스스로 멈추기 때문이다. 스스로 뭔가를 붙잡아서 곁에 두기 때문이다.
/210218
사실 아무튼 연필을 빌리러 갔었던 건데 아무튼 시리즈가 주욱 나열되어 있었고, 연필과 메모, 문구 중 첫 번째로 메모를 읽기로 했다. 명색이 메모 덕후인 나로서는 메모에 손이 안 갈수가 없었다. 그런데 메모 활용법 같은 실용서일 줄 알았는데 에세이 형식의 글이었다. 초반에는 작가의 무의식적인 생각의 흐름을 문자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내용에 실망했다. 필터링 없는 자기 얘기가 끊임없이 나와서 덮을까 고민했지만 짧은 책이니 만큼 끝까지 읽기로 결심했다. 갈수록 저자의 메모에 공감이 갔고 메모로 인해 벌어지는 경험들이 되게 풍부하고 낭만적이었다. 비메모주의자 였던 저자가 메모주의자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기억의 희미함을 갖고 싶지 않아서라고 했는데 나도 공감한다. 당시에는 절대로 잊지 않을거라는 믿음이 강하기 때문에 메모따위는 생각하지 않게 된다. 나의 기억력을 믿고 가기 때문에.. 하지만 인간은 얼마나 망각의 동물인가를 깨닫기 시작한 후로는 메모덕후가 되었다. 모든 경험들을 텍스트로 남겨 놓으면 후에 다시 찾아보게 될 때 추억은 다시 되살아 난다. 나는 일기나 컨텐츠 감상 같은 것들을 자주 적어 놓는 편이라서 나중에 내가 쓴 글을 읽는 게 참 재밌다. 연도별로 무엇에 관심을 가졌으며 점차 어떤 것들엔 흥미를 가지지 않는지도 확연히 알 수 있어서 좋다. 그리고 메모를 하면 내 혼잡한 머리가 정리되는 기분도 느낄 수 있고 다시 생각하는 기회도 된다. 아무튼 책의 후반부는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분야에 대한 메모들이 나와서 기분이 묘했다. 동물이나 채식, 태평양 전쟁 포로감시원 등 나의 시야에 걸쳐있지 않았던 것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감상적이 되어서 눈물이 나왔다. 언제나 소수에 대해서 생각하자는 마음은 다분한데 어째서 실천하지 않고 더 파고들지 않는지.. 반성하게 된다. 아무튼 다른 사람은 어떤 메모를 하며 생각하고 있는지 알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아서 좋았다.